(2017_9급_국가직_한국사(나)_2017년 04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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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과 국민대표회의(1923)
임시정부의 초기 주요 노선인 외교 활동이 번번히 좌절되는 가운데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요청 문제가 계기가 되어 임시정부는 내분에 빠져들었다.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에 비판적인 신숙과 신채호 등은 북경에서 군사통일 준비회를 열고, 이승만을 불신임하면서 독립운동 전체의 방향 전환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 회의의 개최를 주장하였고(1921.4), 이보다 앞서 박은식, 김창숙 등 상해 지역 인사들도 임시정부 개혁 촉진을 을 주장하였다(1921.2). 이에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동조하였다.
국내외 여러 독립운동 단체 대표 140여 명이 참가한 국민대표 회의가 상하이에서 1923년 1월에 열렸다(안창호 제기, 임시의장). 회의에서는 독립운동 과정을 평가·반성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존폐를 둘러싸고 토론하였다. 토론에서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창조파(신채호, 신숙, 문창범)와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는 개조파(안창호, 여운형, 김동삼)가 대립하였다. 두 입장의 차이를 좁히지 못해 회의는 결렬되었다.
이후 창조파는 연해주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소련 정부의 퇴거 요구로 새 정부는 해체되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1925년에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집단 지도 체제를 채택하는 등 체제 정비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떠난 가운데 내각조차 구성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으며 침체에 빠졌다.
② 김구는 김원봉이 주도하는 민족 혁명당의 임시정부의 해체 주장에 반대하며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였다(1935).
③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은 1941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통해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발표하였다.
④ 1918년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단 소속의 김규식은 1919년 2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