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_9급_서울시(2회)_한국사(A)_2019년 06월 15일)
해설보기
오류신고
정답확인
* 발해의 사회 모습
-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귀족인 고씨 등 고구려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수도를 비롯한 큰 고을에 살면서 노비와 예속민을 거느렸다. 발해의 주민 중 다수는 말갈인이며,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었다. 발해 건국 후에 이들 중의 일부는 지배층이 되거나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인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적인 요소와 당의 요소가 함께 있다. 발해의 주거지에서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난방 장치인 온돌이 발견되고 있으며, 묘제에서도 고구려 무덤의 독특한 양식인 모줄임 천장 구조가 보인다(정혜공주묘). 발해의 연꽃무늬 벽돌과 수막새와 치미의 기와 문양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띠고 있다. 상경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석등과 동경성 출토 이불병좌상(흙을 구워 만든 석가불과 다보불이 나란히 앉아 있음)에서도 고구려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수도인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이와 같은 당 문화적 건축물로 길림 장백진 교외에 소재한 ‘영광탑’이 있는데, 13미터 높이의 5층 벽돌 탑이다. 만주 지역에서 현존하는 고탑(古塔)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오래 되었다.
- 발해는 당,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특히, 당과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가장 많은 무역을 하였는데,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일본과의 무역도 규모가 한 번에 수 백명이 오갈 정도로 활발하였다. 신라와는 견직물 등의 분야에서 일정한 경제 교류가 있었다.
- 발해는 유학 교육을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는데, 당의 국자감 관제를 거의 본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