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계리직 기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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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변화
조선 중기 지방 사족은 향촌 사회를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기 위해 향약 조직을 만들었고, 향교·서원 등에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사람을 주빈으로 모시고, 그 밖의 유생을 빈으로 하여 함께 술을 마시는 의식인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예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내세워 활을 쏘게 하는 향사례(鄕射禮)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향촌 사회에서도 사회 경제적 변화로 신분 변동이 활발했다. 양반의 수는 더욱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는 부를 축적한 농민이 지위를 높이거나 역의 부담을 모면하려고 양반 신분을 사거나 족보나 호적을 위조하여 양반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종래의 재지 사족의 힘이 약화되고, 부농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향촌 세력의 힘이 충분히 강해지지 못한 가운데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고 아울러 관권을 맡아 보고 있던 향리의 역할이 커졌다. 이에 따라, 종래에 재지 사족인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여 왔던 향회는 주로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에 의견을 물어 보는 자문 기구로 구실이 변하였다.(약화) 곧, 수령 중심의 국가 권력이 향촌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재지 사족이 지배하고 있던 영역을 장악해 나갔다.
양반(사족)은 군현을 단위로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실시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문중 족보 정리에 힘쓰고,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지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 사우가 많이 세워졌다.
경제력을 갖춘 부농층은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향회를 장악하여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우려 하였다. 부농층은 종래의 재지 사족이 담당하던 정부의 부세 제도 운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직에 진출하거나 기존 향촌 세력과 타협하면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여 갔다. 그러나 향촌 지배에 참여하지 못한 부농층도 여전히 많았다.